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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과 문명
- 등록일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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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참 안식의 완성을 위해 당신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안식’이 깨졌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완성해 놓으신 것이 인간의 힘에 의해 깨어질 수도 있는 것인가?’ 정말 그럴 수 있는 것인가? 아니지요
창세기 2장의 안식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안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창세기의 안식은 단지 하나님의 참된 안식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자로서의 안식이었고
진정한 안식을 완성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가차 없이 그 그림자인 안식을 깨도록 역사를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작정속에서 안식은 깨졌습니다.
인간들은 창세기 3장 5절의 ‘너희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거야’라는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이제 자기가 자신에게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끊겨 버렸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기 내재적 자원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해야 하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세워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가 됨으로 해서 더 이상 무한함으로부터 공급을 받는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재적 자원으로 자신의 행복을 채워야 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내재적 자원의 특징은 ‘한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함으로부터 공급이 차단된 인간은 마치 뿌리 뽑힌 나무와 같아서 잠시 동안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살아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이미 죽어 버린 삶, 다시 말해 죽음을 향해 치닫는 삶에 불과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고 사약을 받아 마신 후에도 상당 시간을 또렷한 정신으로 살아있었다지요?
그때 자신의 제자인 플라톤과 오랜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대화의 대용이 ‘dialogue'라는 책으로 나왔을 만큼 오랜시간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죽은 시간입니다.
이미 사약을 받아 마신 상태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 있었다한들 그게 살아있는 삶이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함에서 떨어져 버린 인간은 이제 한계속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 한계는 죽음을 꼭지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제한된 시간과 자원속에서 죽음을 향해 치닫게 된 것입니다.
죄인들은 이미 사약을 받아 마신 소크라테스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한계’라는 특성은 곧바로 ‘결핍’으로 나타납니다.
무한에서 유한으로 갇혀버린 인간에게 무수한 결핍이 나타났습니다.
타락을 한 인간은 사랑의 결핍으로 갈등과 다툼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지혜의 결핍으로 내일을 두려워합니다.
제한된 시간에 속박됨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의 노예가 되어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하심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지닌 자원만으로 살겠다고 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한 결핍에서 초래되는 것이 ‘고난, 고통‘입니다.
육신의 병고와 심리적 아픔과 사회적 갈등과 가난 등과 같은 모든 고난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결핍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은 인간이 스스로 한계속에 갇힘으로 그들에게 찾아 온 죽음의 증상들인 것입니다.
대지로부터 뿌리가 뽑혀진 나무가 당장은 살아 있지만 서서히 잎이 시들어 가고 줄기가 마르고 이내 썩어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이라는 대지로부터 뿌리가 뽑혀버린 인간의 삶에 시들고 마르고 썩어 버리는 고난이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쉼 없이 일을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일을 해서 자신의 생명을 확대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삶을 확대하고 안녕을 확보하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생명을 더 누리게 하고 의미와 행복과 안녕을 더해주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동시에 죽음도 확대하고 있습니다.
산업혁명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습니까? 여러 방면에서 ’생명‘을 많이 확대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것이 인간성을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물질화 시켰는지요.
이 사회의 인간관계를 완전히 물질화시킴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산업혁명이 공해로 나타나고 과학과 기술 발달이 첨단 무기로 변해 인류를 살상하고 우리 인간을 엄청나게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흔히 들고 다니는 휴대폰이 우리의 자유를 얼마나 확대했나요?
’생명‘을 확대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옭아매고 있나요?
설교를 듣는 중에도 장례를 치르면서도 전화벨이 울리면 할 수 없이 전화를 받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많은 자유를 가져다주는 휴대폰이 우리를 이렇게 속박하기도 합니다.
휴대폰은 거의 독재자의 수준으로 사람들을 속박합니다.
부모님 말은 안 들어도 이 전화벨 소리에는 꼼짝을 못하고 반응을 하고야 맙니다.
우리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게 해서 우리의 자유를 확대하는 통신수단이 동시에 우리를 절대적으로 옭아매는 도구로도 다가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함에서 차단되어 버린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확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인간의 일이요 문명의 정체인 것입니다.
안식일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질 영생’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무한하신 생명력이 다시 부어지게 된 자들이므로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의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안식일에 자기의 먹거리를 위해, 생명의 확장을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영생과 관계없는 자라는 의미이므로 ‘죽음‘이라는 것으로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일을 한다거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돌로 쳐서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날이 대단한 날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밖에 있는 자들은 모두 자신을 예배하고 스스로가 왕이 되어서 사는 자들이므로
그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라는 상징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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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 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주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를 연못에 집어 넣으셔서 낫게 하셨다면
그 사람은 ‘주님은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책을 도와주신 분’으로 밖에 인식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면서도 평생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면서 주님께 그때 그때 도움만을 청하는 그런 엉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방책이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가 세워 놓은 계획에 하나님은 그저 능력으로 도움만 주시면 된다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방책을 세워 놓고 ‘비나이나 비나이다‘하고 빌 때 그 방책을 안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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